독일과 한국의 공부

두어 달 전, 쿡TV(IPTV)로 독일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는 '더 웨이브(Die Welle)'라는 영화를 봤다. (쿡TV에서 영미권이 아닌 다른 나라 영화들을 별도 섹션으로 만들고 무료로 보여주는데 정말 괜찮은 시도 같다. 지난 주말에는 체코 영화를 하나 봤다)

독일의 한 고등학교 교사가 '프로젝트 수업'으로 자기가 원하던 '무정부주의' 대신 '전체주의' 강의를 맡는다. 전체주의에 대해 학생과 수업하는 와중에 학생들이 실제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자기들끼리 배타주의적인 그룹을 만들어가다 폭력 사태까지 발생하는 등 파국으로 끝나고 수업은 폐강된다는 내용이다.

영화도 상당히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놀란 것은 고등학생들이 '무정부주의'나 '전체주의'라는 주제로 강의를 듣는다는 사실이었다. 나도 학생 때 저런 식의 수업을 받았으면 얼마나 재미 있었을 것이며 흥미롭게 들었을까.

현재 한국 학생들이 어떤 공부를 하고 있나.


학교에 오자마자 허리를 밧줄로 의자에 묶는다. 잠이 오면 손목에 감아둔 고무줄을 튕겨 잠을 쫓는다. 시간을 확인하는 손목시계에는 '시간을 아껴 쓰라'는 문구가 박혀 있다.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는 '공부하는 화석' 유승빈(경희고 2)군의 공부법이다.
스스로 문제를 출제하는 것. 문제를 분해하고 고민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통해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다는 게 유군의 설명이다.
허리를 의자에 묶고 공부하는 것보다 내 주의를 끈 것은 문제를 분해하고 조립해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한다는 부분이었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오로지 4지->5지 선다형 객관식이나 한 두 단어로 딱 떨어지는 단답식 문제를 풀기 위해 "출제자가 함정을 판 건 없나" "이 문제를 쉽게 푸는 방법은 없다" 이런 잔머리 굴리기만 늘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대학 갈 때는 수능 2번에 4과목 본고사, 논술고사 등 각종 시험을 한꺼번에 치른 해여서 단답식 문제만 풀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나라 교육의 본질은 "문제 잘 풀기"다.

고등학교 때 이미 '무정부주의' 수업을 들을까, '전체주의' 수업을 들을까 고민하는 아이들과 문제풀이 기술을 연마하는 아이들. 어떤 교육이 아이들을 진정한 인재로 키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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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9 11:06 2010/02/0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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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노씨 2010/02/09 12:37 # M/D Reply Permalink

    대한민국에서 중등교육(물론 대학교육도 방구나 뽕이나 싶긴 하지만)은 너무 일방적인 체제순응기제, 체제정당화기제로 작용하는 점에서 가장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사회이든 교육'제도'은 그런 기능을 갖고 있지만, 너무 획일적이고, 서열적이며, 학생들의 상상력을 축소왜곡하는 현 시스템은(물론 그게 대한민국의 메커니즘이고, 정신?이지만요...;;;)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추.
    백만년만에 포스팅하셨군요. : )
    좀더 자주 블로그에서 만나기를 바라봅니다.

    1. 2010/02/09 16:14 # M/D Permalink

      그건 교육의 내용보다 1% 성적을 위해 모두 내달리는 경쟁 구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들 그 1% 안에 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내달리는.. 그 1%도 대학을 가면 취직 경쟁에.. 이런 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평생을 쫓기듯 살아가도록 돼 있는 구조 자체가 문제겠지요..

      추. 저도 좀더 자주 블로깅할 생각입니다. :)

  2. 강정수 2010/02/09 13:25 # M/D Reply Permalink

    유군은 그래도 개천의 용과군요… 가난한 지역의 학교에서 입시공부쪽 소질은 없는데 강제로 학교에 10시까지 잡혀있으면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학생들… 그들을 보듬을 사람은 어디에…

    1. 2010/02/09 16:14 # M/D Permalink

      그러게 말입니다.. ㅠㅠ

  3. 키엘 2010/02/09 13:40 # M/D Reply Permalink

    수능 2번에 본고사+논술이면, 왠지 저랑 같은 해에 시험 보시것 같군요. 아, 저는 재수하느라 학력고사도 한번 봤지요.

    학교 교육이야 그렇다고 쳐도, 그외에 다른 방법들이 있지 않을까요.. 제가 고등학교때는 친구들과 추리소설 많이 읽기 경쟁이라던지, 뭐 그런것도 했었는데.

    1. 2010/02/09 16:16 # M/D Permalink

      키엘님도 이제 자녀교육 때문에 고민하실 때 아닌가요.
      (우주가 언제 학교 들어가죠?)
      전 딸들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옵니다.
      마음껏 뛰놀게 하고 싶어도 뛰놀 친구들이 모두 학원에 가 있는 게 요즘 현실이니, 도대체 어떻게 키워야 할지..
      게다가 이른바 '대안학교'라는 곳은 직장맘에게는 그림의 떡이니 말이지요. 일반 학교보다 엄마들의 공동체 참여가 훨씬 더 요구되고, 그렇지 않은 바쁜 엄마는 소외되는..

    2. 키엘 2010/02/09 18:28 # M/D Permalink

      우주가 이제 만 5세니까 슬슬 고민 할때가 됐지요. ^^;
      조카가 초등5학년인데 국영수 3가지 학원만으로 10시에 들어오는것을 볼때마다 짠합니다.
      부모님이 집에 늦게 들어오는 집이라, 학원안가면 뾰쪽한 수가 있는것도 아니고..
      저희 집도 맞벌이이니 초등학교 들어가면 어떻게 해야할지 머리에 쥐가납니다.

  4. Y군 2010/02/09 15:56 # M/D Reply Permalink

    많은 동감이 갑니다.
    아직 아이를 가지지도 않았는데 최근 들어서는 홈스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부모의 사람과 관심에 체계적인 지도법이 함께한다면 얼마든지 제도교육을 넘어서는 교육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 같아서요.

    1. 2010/02/09 16:23 # M/D Permalink

      미국에선 홈스쿨링도 꽤 호응을 얻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회성을 기르는 데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갑자기 미국 지사로 발령 나서 영어 못하는 자녀가 처음에 곤란을 겪었는데, 교사가 학교 내에 한국에서 온 공부 잘 하는 학생을 옆에 앉혀서 도와주도록 한 뒤 급격하게 성적이 올랐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그림)도 찾아서 그쪽으로 진로도 정했고요.
      또다른 분은 미국에 있을 때 학교 선생이 매일 서술형 과제를 내 주는데, 자녀가 영어를 잘 못해 문법적으로 틀린 부분을 일일이 첨삭 지도해 준데다 아이디어가 참신해 좋은 점수를 받은 경우도 많다고 하더군요.
      굳이 교육의 모범으로 칭송되는 핀란드가 아니라도 교육의 목적이 경쟁이 아닌 학습과 자기계발에 있는 나라는 꽤 많은 것 같아요.
      반면 우리나라는 교육의 목적이 등수를 매기는 데 있지요. 이런 상황에선 뭐든지 왜곡됩니다. 학교에서 복잡한 숙제를 내 주면 부모들이 다 해 줍니다.
      예체능 수업도 뭘 가르쳐주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서 '수행평가용 사교육'을 시켜야 하죠.

      아 또 쓸데없이 주저리 주저리 길어졌네요.
      결론적으로 우리나라는 교육의 목표가 잘못됐다는 것.. 거기서 모든 문제가 비롯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5. 너바나나 2010/02/09 20:31 # M/D Reply Permalink

    사교육을 줄여서 공교육을 강화하자라고 하더만요. 근디 그 공교육 강화라는 거이 학원수업을 학교에서 하자로 그치더라구요. 이래선 사교육이 줄어들리가 없을 것 같구만요.

    교육방식과 인재를 뽑는 방식 자체가 이런식으로 변해야 할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구만요.

    1. 2010/03/04 18:06 # M/D Permalink

      거의 한 달 만에 답글을 다네요..
      죄송.. ㅠㅠ
      하지만 '댓글을 다 달겠다'라는 올해의 결심을 지키고 싶어서.. ^^
      개인적으로 교육 문제를 총체적으로 뒤집으려면 대통령 임기가 미국처럼 연임 가능한 식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임기가 짧으니 교육처럼 당장 효과가 나지 않는 부분은 손을 대려고 하지 않고..
      영원히 이 상태가 유지되는 것 같아요.

  6. 동글 2010/02/10 18:11 # M/D Reply Permalink

    좋은 포스팅 잘보고 갑니다.

  7. leopord 2010/02/10 22:53 # M/D Reply Permalink

    펄 님 블로그에 덧글 남기긴 처음인 것 같습니다(제 기억이 맞다면 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꼭 핀란드, 스웨덴이 아니더라도 배움의 목적을 성적과 서열에만 두지 않는다면 숨통이 트일텐데, 사회가 거대한 연줄의 망이다 보니 도리어 입시경쟁이 합리적인 수단으로 선택되는 역설이 계속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많이들 이게 문제다, 저게 문제다 고민도 많고 옳은 이야기들이지만, 정말 아이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게 엄마(부모)의 딜레마 아닌가 싶어요.

    <얼마 전 이 지면에 “보수 부모는 당당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고 진보 부모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는다.”고 적었다. 진보적인 사람들의 위선을 질타하려는 게 아니라 자본의 파시즘 하에서 진보의 정체성을 함께 되새기려 한 이야기다. - 김규항, 우리의 엘리트>

    다 동의하진 못하더라도 김규항의 말에서 '더 나은 방법'에 대한 고충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1. 2010/03/04 18:05 # M/D Permalink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까지는 유치원이라 괜찮은데, 이 시기에도 꼭 남들 따라 영어유치원을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닌 부모들이 많아요.
      학교 들어가면 저도 많이 고민하게 되겠지요.
      게다가 이른바 '대안학교'라는 곳도 치맛바람이 세다는.. ㅠㅠ
      얼마 전 캐나다로 부인과 딸을 보낸 아빠를 만났는데..
      얘기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ㅠㅠ

  8. silent man 2010/02/15 03:13 # M/D Reply Permalink

    누가 그러더군요. 한국에선 토익을 900점 맞아도 문제 푸는 기계일 뿐이라고. 쩝.

    + 쿡 티비 괜찮더라구요. ㅎ

    1. 2010/03/04 18:03 # M/D Permalink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은 시험 자체가 목표이기 때문에..
      토익도 문제풀이 기술을 주로 연마하죠.. ㅠㅠ

      (너무 늦은 답변 죄송..)

  9. 써머즈 2010/02/16 21:52 # M/D Reply Permalink

    설 잘 보내셨어요? ^^

    예전에는 IPTV 에 볼 게 별로 없었는데 요즘은 많이 좋아졌나봐요.

    1. 2010/03/04 18:02 # M/D Permalink

      보름이나 지나서 답변을 다네요.. 죄송.. ^^;;
      요즘 쿡TV 볼 만한 거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래도 스포츠 채널이 없어서 아직 스포츠 팬들은 케이블TV를 선호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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