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권하는 국가(한은소식 5월호)

*이 기고문은 한국은행 사보인 한은소식 5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foog님의 최근 글을 읽고 'ownership society'란 문구를 보고 전에 이 글을 썼던 것이 떠올라 뒤늦게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오너십 소사이어티(Ownership Society)’
2004년 말 재선에 성공한 조지 W 부시 미 전 대통령의 선거 슬로건이다. 당시 미국 밖에서 최대 관심사는 이라크전이었지만 부시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데는 집권 1기부터 들고 나온‘누구나 주인이 되는 사회’라는 슬로건의 역할도 컸다.

부시 정부가 제시한 오너십 소사이어티란 시민이 세금을 내고 필요한 것을 국가로부터 제공 받는 대신 개개인이 소유권을 직접 행사하는 사회란 개념이다. 명분은 ‘개인이 국가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을 더 자유롭게, 주체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집, 기업, 연금, 보험 등 모든 사회보장 분야에서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겠다는 보수 우익의 신념을 담은 정책이었다.

여러 분야의 오너십 중 부시 정부가 가장 집중한 것이 바로 ‘집’이었다. 직장에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집을 갖는 것이 바로 미국 가정이 추구해야 할 행복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사회 불만 세력이든 누구든 집을 사면(지킬 것이 생기므로)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신념이 바탕에 깔린 것이기도 하다.

정부는 집을 사면 세금을 감면해 주었고, 신용이 낮은 사람도 집을 살 수 있도록 금융으로 뒷받침해줬다. 모기지업체들은 모기지채권을 유동화해 국책주택금융기관(GSE)인 패니메이나 프레디맥에 넘겨버리면 위험을 지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저신용자들에게도 집값의 극히 일부만 내면 집을 살 수 있도록 대출을 해 주었다. 처음으로 주택을 구입하는 저소득층의 경우 1만달러를 정부로부터 지급 받았기 때문에 나머지를 대출을 받으면 거의 공짜로 집을 살 수 있었다. 그 유명한‘서브프라임 모기지’다.

안타깝게도 미국 중앙은행의 수장,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이 정책의 파국적인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기 저금리 정책으로 적극 호응했다. 정보기술(IT)주 거품 붕괴와 9.11 테러 등으로 경제가 충격을 받은 후 금리를 급격히 낮추어 경제를 안정시킨 것까지는 좋았으나, 경기가 정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저금리 상태를 계속 유지하며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것이다.

그린스펀은 의장에서 물러난 뒤 쓴 회고록 <혼돈의 시대>에서도“주택 보급 확대의 이점은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통화가치, 즉‘돈값’을 수호해야 한다는 중앙은행 총재의 임무를 망각한 발언이다.

저소득층에 돈을 쉽게 빌려주었다가 부실로 이어진 경우는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있었다. 2002년 상호신용금고에서 상호저축은행으로 문패를 바꿔 단 저축은행들은 2001~2002년 정부 정책에도 호응하고 외환위기 이후 위축됐던 영업도 만회하기 위해 300만원 미만 소액신용대출을 크게 늘렸으나 부실화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2001년 말 11퍼센트 정도였던 저축은행의 소액대출 연체율은 불과 2년 후 51퍼센트로 뛰어 올랐다. 신용카드 대란도 사실 이름과 달리 신용은 파악하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신용카드를 발급해 주도록 한 정부 정책이 불러 온 것이었다.

무수한 사례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을‘세금’이 아니라‘금융’으로 했다는 것이다. 집이나의료, 교육 등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소득이 적다고 노숙을 할 순 없는 일이고 자녀가 아픈데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가난하다고 자식마저 학교에 안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당장 급전이 필요하면 나중에 갚을 능력을 따지지 않고 우선 돈을 빌린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규모 부실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현 정부도 출범 후 지속적으로‘서민금융’을 강조하고 있다. 저리에 소액창업자금을 빌려주는‘미소금융’, 시중은행에서 취급하는 저신용자 대상 10퍼센트대 소액신용대출인‘희망홀씨대출’에 이어 최근에는 저축은행과 상호신용기관들에 80퍼센트 보증을 서줄 테니 2조원 규모의 저신용자 소액신용대출을 하라고 했다(햇살론). 하지만 가계부채가 소득에 비해 너무 빠르게 증가해 심각한 수준까지 증가한데다 앞으로 금리 인상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과연
이렇게 저신용자 대출을 늘리는 정책의 부작용이 없을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한 신용정보업체 사장은‘유럽에 가 봤더니 저소득층이 굳이 대출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면서‘생활에 꼭 필요한 거주, 의료, 교육은 나라에서 담당하기 때문에 굳이 급전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대부업체 고리에 시달리는 채무자들에게 대안을 제시해주는 차원에서 서민금융정책은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서민을 위해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갚을 능력도 없는 국민에게 빚을 지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질 필요가 없도록 해 주는 것이다.

부자에겐 세금을 감면해 주고 서민에게는 싼 이자에 빚을 지게 하면 몇년간은 모두 즐겁지만 그 이후에는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결말이 이어진다는 것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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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5 15:42 2010/08/0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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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테라의 생각

    Tracked from terra's me2DAY 2010/08/05 19:06 Delete

    “빚 권하는 국가” — 펄의 Feelings blog ((방금전 햇살론 관련 기사를 보고, ''어려운 서민들이 대출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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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2010/08/05 15:50 # M/D Reply Permalink

    햇살론, 미소금융... 참 짜증납니다. 아~~

    1. 2010/08/05 17:25 # M/D Permalink

      자녀 등록금 때문에 돈 빌리다 저신용자 되고(제대로 갚더라도 2금융권에서 빌리면 등급 떨어지죠) 햇살론 빌리게 된 이 아버지 사연 보고 눈물 났습니다.
      ==================================================================
      신협 햇살론 대출자 1호는 아들의 학자금을 마련하려는 50대 아버지로 나타났다.
      26일 신협중앙회에 따르면 설비 엔지니어링 회사에 근무하는 직장인 이 모씨(50)는 이날 오전 부천에 소재한 남부천 신협에서 햇살론을 통해 생계비로 800만원을 대출받았다.

      신용등급 7등급인 이 씨는 그동안 아들의 등록금 마련을 위해 동부서주하다 집근처 신협의 햇살론 홍보물을 보고 대출을 받게 됐다고 밝혔다. 이 씨는 그간 부족한 학자금을 급히 카드론이나 현금서비스로 메우다 보니 신용등급이 7등급까지 떨어져 은행대출이 어려웠다.

      그는 "하나 뿐인 아들인데다 카이스트를 나와 일류대대학원에 입학한 수재라 누구보다도 자랑스럽다"며 "하지만 이번 학기 학자금 마련이 여의치 않아 너무 걱정됐는데 때마침 햇살론을 받게 돼 다행"이라고 전했다.

      이 씨는 “대학생 자녀가 있는 학부모들은 요즘 등록금 마련이 얼마나 힘든지 상상도 할 수 없다"며 "소득이 줄어드는데다 신용등급 마저 낮은 사람들은 저리 대출을 꿈도 꾸지 못하기 때문에 카드론이나 대부업체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 kalms 2010/08/17 21:40 # M/D Reply Permalink

    완전공감 대공감 입니다.
    신선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아 이 선동과 캠페인의 시대.
    그나마 블로그와 RSS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1. 2010/08/19 18:42 # M/D Permalink

      과찬의 말씀입니다. 격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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