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정말 영어가 국가 경쟁력일까?
필리핀과 인도의 차이
필리핀과 인도는 모두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오랜 기간 영국(필리핀은 스페인->미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발전은 오히려 우리나라에 훨씬 뒤쳐졌다. 그나마 인도는 최근 수년동안 콜센터와 IT 소프트웨어 분야의 아웃소싱 산업으로 크게 성장했지만 필리핀은 그렇지 않다. 영어 잘 하는 가정부와 영어 잘 하는 건설 노동자가 필리핀의 주요 수출품목이다. 홍콩의 부잣집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비참한 상태로 일하다 견디지 못하고 소송까지 간 필리핀 가정부의 사례가 종종 기사로 등장한다. 요즘에는 중국 본토 부자들도 필리핀인 가정부를 고용하는데, 이들이 '영어를 잘 하기 때문에' 자녀 교육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여 각광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받는 임금은 한국돈으로 월 32만원에 불과하다.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 ··· 5170.htm)
필리핀의 여성들이 가정부로 세계에 진출하고 있는 동안 필리핀 남성들은 세계 곳곳의 건설현장에서 뛰고 있다. 수십년 전 한국의 아버지들이 사우디에서 땀을 흘리던 것과 비슷하다. 이명박 당선자가 두바이에서 영어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하는데, 두바이의 수많은 건설현장을 직접 방문해 보지 않았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필리핀 건설 노동자들은 '영어 실력 덕분에' 두바이와 아부다비 같은 중동의 거대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지만 역시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매일 수명이 죽어나가는 비참한 현실에 처해 있다. 임금 수준은 월 30만원 정도에 불과하며 직업과 인종 때문에 대놓고 차별을 받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 ··· 01942629)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관을 신축하는데도 '영어를 잘 하는' 필리핀인 건설 노동자들이 동원됐다. 이들은 중동 건설현장으로 간다는 모집책의 말을 듣고 자원했으나 송출 업체가 비행기를 바그다드에 내리는 식으로 '납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 ··· 041.html)
인도의 다국적 기업 콜센터 아웃소싱 산업도 사실상 '영어가 국가경쟁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수억명의 인구 덕분에 임금이 선진국에 비해 훨씬 싼 인도는 독특한 억양에도 불구하고 일단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선진국 기업들의 콜센터 아웃소싱의 메카가 됐다. 그러나 하루종일 제대로 잠도 못자며 일하는데다(미국과의 시차 때문) 고객들의 불만을 접수하는 콜센터 업무의 특성상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일이 수년 동안 반복되자, 이제 콜센터는 인도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일이 됐다. 또 모기업에서 억양을 문제 삼아, 또는 개인정보 유출 등을 우려해 인도 콜센터에서 철수하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http://www.newsva.co.kr/uhtml/read.jsp? ··· tion2%3D)
반면 인도가 최근 수년 동안 급성장한 부분은 IT(소프트웨어) 아웃소싱이다. 처음에는 모국에서 설계한 아키텍쳐를 바탕으로 단순 코딩업무를 했으나, 뛰어난 수학 감각(?)을 지닌 국민들답게 높은 수준의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고급 프로그래머들(선진국에서도 이런 고급 개발자들은 구하기 어렵다)이 생겨나면서, 미국 본사까지 진출하거나 인도 내에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프로그래밍을 아웃소싱하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인도에서도 고급 개발자들은 높은 임금을 받는데, 이들은 '영어만' 잘 하는 게 아니라 수학과 논리력이라는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에 이 같은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인도의 임금이 높아지면서 IT 분야에서도 저급 개발(단순 코딩 등)은 중동이나 아프리카 중국 등지로 이전되고 있다.
이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영어는 분명 다국적 기업을 끌어들이는 하나의 '요인'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국가 경쟁력'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필리핀과 인도는 사실 영어뿐 아니라 '저임금'이 가장 큰 국가경쟁력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가정부와 건설 노동자 수출, 콜센터 아웃소싱 등을 할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그 정도 수준의 개발단계는 넘어선 상태다. 한국은 이미 중공업과 제조업 시대를 지나 지식기반산업으로 산업고도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있다. 지금 청년 실업자들이 많다고 아우성이지만 이들이 월 30만원 받고 가정부나 건설 노동자 일을 하라면 할까?
결국 영어'만' 잘 해가지고서는 쓸모가 없다. 진짜 국가경쟁력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차라리 수학이나 과학을 공부하는 게 낫다. 지금도 '영어 잘 하지만 기술은 없는' 한국인이 미국에 무작정 가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지만 '영어는 서툴지만 프로그래밍을 능숙하게 하는' 한국인은 오히려 취업도 잘 되고 캐나다 등에도 전문 기술직으로 이민을 갈 수 있다. 영어가 국가 경쟁력이라는 것은 영어에 한 맺힌 세대들의 일차원적 사고에서 나온 발상이다.
영어에 '올인'하면 기러기 아빠 더 늘어난다
이명박 당선자는 영어 교육 강화를 위한 또하나의 이유로 기러기 아빠를 들었다. 한국 학교가 제대로 영어를 못 가르치니까 사교육 시장이 커지고, 또 기러기 아빠까지 만들어 가며 해외로 떠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영어를 잘 할 수 있도록 공교육을 강화하면 된다는 것이다.
일견 일리가 있는 논리로 보인다. 하지만 영어를 '잘 하는' 건 어느 정도를 뜻할까?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 비즈니스 회화 수준? 아니면 미국에서 태어난 것처럼 능숙한 언어 구사? 혹시 문법에 맞는 언어 구사와 현란한 혀 굴림, 대학 교수들이 구사하는 수준의 어휘력? 이미 머리가 굳은 성인은 미국에서 2~3년을 살아도 영어가 늘지 않는데 그 정도로 능숙한 영어 구사가 가능할까?
어느 수준으로까지 영어 실력을 늘리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으로는 '웬만한 수준의 의사소통'이 한계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국가가 나서서 영어를 최대 교육 목표로 삼는다면 "내 자식에게만은 영어를 '웬만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 '현지인처럼 능숙한 수준'으로 가르쳐야 겠다"는 부모들이 늘어날 것은 불보듯 뻔하다. 지금은 일부만 기러기 아빠가 되지만, 이렇게 되면 전국민이 기러기 아빠가 되기를 감수하고 자녀를 영어권 국가에 보내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게 될 것이다.
온 국민이 영어에 '올인'하는 바람에 생겨난 문제를 더 강력한 '영어 올인 정책'으로 해결하는 것이 그들의 짧은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국민들이 영어에 올인하지 않게 함으로써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입과 취업이라는 두 가지 인생의 관문에서 영어가 어떤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해야만 가능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가가 개입하든 개입하지 않든 전국민적 영어 올인 분위기, 그리고 이에 따른 막대한 국가적 자원 낭비와 비효율을 해결할 수 없다.
문제 해결 방안은 입시와 채용에서 영어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대입에서 영어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고교 과정과 수능 시험에서 언어영역을 제외하고 영어를 포함한 모든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하되 각 학과별로 과목별 가중치를 부여한다. (언어 영역을 제외하는 이유는 한국어가 단지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공학도라면 수학을 잘 하면 되고 이학 계열은 물리 화학,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다면 정치 경제 과목의 비중을 높인다. 대학 공부를 위해 필요한 영어는 영어책을 사전 보면서 읽을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대학생 모두가 원서 읽으며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모두 영어를 마스터하느라 투자하는 시간에 일어를 빨리 배워서 수많은 일어판 전문서적을 읽는 게 연구에는 더 도움될 수 있다. 일본 대학교의 연구 실적이 뛰어난 이유는 전국민이 영어를 잘 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필요한 연구서적은 모두 일어로 번역해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는 기업에서 사람을 선발할 때 영어를 기준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청년 실업자가 많다 보니 사람을 뽑을 때 토익 성적 900점, 800점 이하는 탈락시켜 버리는 게 기업 입장에서는 편리하다. 하지만 토익 성적 좋다고 영어 잘 하는 것 아닐 뿐 아니라 무엇보다 기업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인재를 뽑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국내 굴지의 통신기업에 있는 한 상무와 최근 대화를 나눈 적 있는데, 전국에 있는 수만명의 직원 중 업무 때문에 영어를 아주 조금이라도 사용해야 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로, 1%조차 안 된다는 것이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직원들의 극히 일부는 임원까지 올라가거나 영어를 사용하는 부서로 발령을 받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퇴직할 때까지 영어 한 마디 하지 않는다. 차라리 뽑힌 다음에 쉽게 자리를 옮기지 않는 '충성심' 있고 무슨 일이든 잘 할 '패기'가 있는 직원을 뽑는 게 낫다고 했다.
기업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오히려 국어 실력이다. 토익 실력 900점 이상 인재를 뽑아 놓아도 한글로 보고서를 쓰고 한국어로 프리젠테이션을 하라고 하면 비문과 오자 투성이다. 아마 이들에게 영어로 보고서를 쓰라고 했다면 밤새워서 쓰는 한이 있더라도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 있는지, 관사 하나 빠뜨리지 않았는지 검토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는 모국어인데도 문법이 틀렸는지 모를뿐 아니라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기업에서 주로 쓰는 말은 한국어라는 점이다.
국가가 할 일은 21세기형 인재를 키워내는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일
결국 국가가 할 일은 영어 올인 열풍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어 열풍을 잠재우는 것이다. 범국가적 '영어 퇴치 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그리고 영어 때문에 낭비되는 수많은 자원을 다른 생산적인 곳으로 돌려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자 잘 하는 분야의 능력을 최대한 잘 키워 진정한 21세기형 인재를 키워내는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사고력을 키워주는 '철학, '논리학'을 '윤리'라는 왜곡된 과목명으로 암기식으로 가르치고, 수학도 문제풀이 자체를 외우는 암기식으로 공부하도록 놔둬서야 제조업(삼성전자)을 능가하는 구글이나 애플 등 창조적 기업이 나올 수가 없다. 나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암기과목'이라는 말을 싫어했는데, 도대체 물리나 화학 같은 과학 과목이 '암기' 과목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치열한 토론이 벌어져야 할 철학(윤리) 시간에 어떤 철학자는 뭐라고 했고 어떤 철학자는 뭐라고 했는지 줄줄 암기만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교육에 대한 근본적 철학이 부족한 상태에서 우리나라의 앞날에 대한 잘못된 비전(대운하를 바탕으로 한 건설국가?)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 이명박의 영어정책인 것이다.
한정된 국가 예산이라는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의 미래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한 자수성가형 지도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거한 잘못된 판단이 한국의 5년이 아니라 10년, 100년을 그르치지 않을까 두렵다.
ps. 졸고를 여러분들이 추천해 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트랙백도 감사히 받았습니다. 몸이 아파서 뒤늦게 답글을 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펄